어이없는 중2병 망상…까뮈 이방인 리뷰

까뮈의 이방인을 읽으면 어이가 없습니다. 중2병 망상에 걸린 철 없는 인간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이 인기가 좋다는게 저를 슬프게 만듭니다. 아래 글에서 저의 리뷰를 보여드리죠.

까뮈 이방인 썸네일

어이없는 까뮈의 인기

까뮈의 이방인은 왜 한국에서 인기가 많을까요? 신기할 따름입니다. 한국에서 그는 마치 최고의 철학자처럼 추앙받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현대 한국의 사상적 뿌리가 빈약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됩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중국식 사고방식으로 한국 민중들이 오랜 세뇌를 당했고, 한 수 아래라고 무시해왔던 일본에게 36년간 지배를 받은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무엇이 좋은지 나만의 기준이 없고 나보다 강해보이는 사람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냄비 근성입니다. 최근까지도 군인에게 오랜기간 독재 통치를 받은 것도 한국의 사상적 뿌리가 빈약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 빈약한 뿌리에는 미국과 유럽, 일본의 문화가 ‘선진국에서 나온건 무조건 좋은것’이라는 명제가 다량 이식되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소용돌이를 혹자는 한국의 다이나믹함이라고 포장을 합니다만 제가 관찰한 결과 그냥 근본이 없는 위태로운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알베르 카뮈는 한국인들이 선망하는 잘난 유럽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그의 어설픈 반항자적 태도는 저항감 없이 한국인들에게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봐도 그와 다른 이유는 전혀 못찾았습니다. 이런 현실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어이없는 중2병 망상 : 삶은 변증법인데

까뮈 이방인 속 주인공 뫼르소는 심심하고 삐딱하며 부정적인 전형적 프랑스인입니다. 인생이 무료한 직장인이고 매사에 심드렁합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딱히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살인까지 저질렀음에도 자신의 범죄에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범죄를 심문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의 행동을 팔자좋게 관찰이나 하면서 인생이 부조리하다며 궤변을 지껄이고 있습니다.

궤변을 열심히 빌드업한 까뮈는 결론으로 종교를 통한 현실 도피가 아닌, 죽음 앞에 당당하게 직면할 때 사람은 솔직하고 인간다워지는 것이라며 중2병 걸린 인간처럼 어이없는 망상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런게 통한다는게 어이없을 따름입니다.

인생을 축복으로 여기고 감사하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면 세상은 살 만합니다. 불평보다 위대한 신성의 힘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있습니다. 왜 미친 인간처럼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불평해야되나요? 불평과 저항이 인간의 최종 답인가요? 그래서 얻는게 있던가요?

인생은 정말로 고통이 기본 원리일지도 모릅니다.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부조리를 부조리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인생에 많습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축복으로 여기며 하나씩 극복하고 화해해가는 변증법적 과정이, 인생의 묘미일지도 모릅니다. 지랄 발광이 문제 해결에 무슨 상관인가요? 중2병 망상자인 멍청한 까뮈가 이런걸 알 리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만 나의 실존이 명확해지는건 아닙니다. 고통과 행복이 반복되는 이 지구 시스템의 삶 자체가, 매 순간이 실존인 것입니다. 왜 과거 따로, 현재 따로, 미래 따로인가요? 과거가 미래를 만들고 지금이 영원입니다.

이런 생각을 까뮈는 못 하기 때문에 세상을 개별자의 환상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항과 분열이 결론이 되는 한심한 논리가 나오죠. 저항과 분열로 문제가 해결된 사례가 있나요? 복수는 복수를 부를 뿐. 실력자는 조용히 더 선한 것으로 악을 껴안고 그것을 극복합니다. 자타불이를 모르는 까뮈는 정말 멍청합니다. 까뮈에 감동하는 독자는 더 멍청합니다. 삶은 변증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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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어이없는 중2병 망상가 까뮈의 이방인을 리뷰해드렸습니다. 까뮈같은 불평도 필요한 일이죠. 비판을 해야 발전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판보다 중요한건 있는 그대로를 진지하게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것도 있는 그대로 존중한 다음 더 좋은 것을 통해 고쳐나가는게 순서죠. 삶은 개별적인게 아니라 연결의 연속입니다. 변증법의 큰 틀에서 삶을 보지 못하면 까뮈처럼 개별자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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